역사를 찾아서 520편 노산군 일기 어떻게 읽을 것인가(3)-과연 문종은 독살당했을까?
역사를 찾아서 <제520편> ‘노산군 일기’ 어떻게 읽을까 방송:2014년 10월 12일 (일) 00:05 ~ 01:00 (한민족방송, 제1라디오) 각본-이상락 연출-김태성 문순1부:세자의 결혼식을 치르지 못하고 깊은 병중에 빠진다 2부:문정의 죽음이 던지는 역사적 의미 3부:과연 문정은 독살되었을까?4부 노산군 일기 어떻게 읽을 것인가, 3부 문종은 과연 독살당했을까? ▷ 조선왕조실록이 기록으로만 보면 문종은 아무런 유언도 남기지 않고 눈을 감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 그런데 『연려실 기술』에는 문종이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성삼문 등에게 어린 세자의 안위를 부탁했다는 내용의 기록이 나와 있다. 문종은 병에 시달리는 와중에 집현전의 여러 신하들을 불러 촛불을 켜고 이야기를 나누고 한밤중이 되자 무릎 아래 어린 단종을 앉혀 놓고 손으로 등을 쓰다듬으며 어린 단종의 뒷날을 부탁한다. – 손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은 주상전하의 충직한 신하로서 멋지고 훗날 보위를 계승하는 세자 전하가 훌륭한 군주가 되도록 정성을 다해 받들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 문정이 술잔을 들어 권하자 손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이 모두 취하도록 마셨다. 이윽고 신하들이 모두 왕 앞에 쓰러져 정신을 차리자 입직청에 나란히 눕혀 놓았다. – 그날 밤 폭설이 내렸는데 다음날 아침 신하들이 술을 깨보니 이상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했고 온몸에는 모피 가죽옷으로 뒤덮여 있었다. 왕이 직접 덮어준 것이다. 신하들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왕의 특별한 은혜에 보답할 것을 다짐했다. – 문종이 아프긴 했지만 아직 기력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집현전 학자들에게 어린 세자를 청한다는 말을 남겼다면 자신의 병세가 이미 가망이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런데 영려실 기술의 이 기사 말미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덧붙여져 있다. “그러나 훗날 숙주의 거취는 저 모양이 되고 말았다.” 훗날 성삼문 박팽년 등이 단종 복위운동을 하다가 처형된 것과는 달리 같은 집현전 학사 출신이면서도 신숙주는 단종을 죽인 세조에게 협조했기 때문에 그런 구절을 덧붙인 것이다. 물론 이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는 없는 내용이다. ▷ 문종은 꽤 며칠 동안 병으로 돌아가셨는데, 그의 치밀한 성격으로 보아 열두 살 어린 세자를 남기고 아무 유언도 없이 눈을 감았다는 점이 좀 이상하지 않은가? 조선 국왕 이야기에서 저자 임영한은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문종은 병상에 누워 열흘 남짓 지난 5월 14일 유시에 강녕정에서 사망했다. 실록에는 전날까지만 해도 위독하지 않고 계속 호전되다가 이날 갑자기 사망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유언도 없었다. – 또한 의정부 관리들은 국왕이 위독함에도 하급 관리들만 시켜 안부를 물을 뿐 아무도 왕을 면치 못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도 조작 냄새가 난다. 유언이 없었다는 것은 국왕의 유훈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후계자로서 단종의 권한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다.”-무슨 뜻이냐 하면 만약 문종이 병석에서 대신과 수양대군을 비롯한 왕자들을 불러 어린 세자가 보위를 이어 국정을 살피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과인에게 한 것이나 다름없는 충성심으로 새 임금을 보좌해야 한다는 유언을 했는데도 어린 단종을 왕위에서 몰아낸다면 그것은 명백한 반역행위가 된다. 따라서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이 반역자가 되기 위해 일부러 문종이 아무런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고 처리했을 것이다. ▷ 단종 즉위년 5월 18일 기록을 보면 문종의 유언과 관련하여 조금 이상한 기록이 보인다. – 문종이 돌아가시기 전에 동생인 수양대군을 만나고 싶다고 했으나 주변 사람들이 ‘수양’이라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후궁인 ‘숙의’를 만나고 싶어 이해하고 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다음 구절에서는 문종이 수양을 부르려 한 것은 “후사를 부탁하려 했기 때문이었다”고 문종의 속마음까지 헤아려 쓰고 있다. 사실 문종은 숨을 거두기 전에 동생 수양대군을 불렀을 가능성이 있을까? 단종실록 1권, 단종 즉위년 5월 18일 경술 네 번째 기사 1452년 경태 3년 근정문에서 즉위하여 교서를 반포하는 노산군이 근정문에서 즉위하여 반교하는 것을 정중히 생각하면 태조가 하늘의 밝은 명령을 받아 대동을 웅거하여 차지하고 태종 세종이 선업을 빛내고 퍼뜨려 문치에 태평에 이르고 생략 초 제사할 조목을 논의할 때 겸판 이조 이하와 같이 공사는 공물이다. 이날 위사와 백관들은 모두 소리 없이 울어 세조가 가장 비통해했다. 이용은 붕어한 뒤부터 매양궁전 마당에 들어서자 기뻐하는 것이 안색에 나타났다. 상제에 곡림할 때 세조가 애통함이 지성에서 나오므로 조신들로 바라보는 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이영만은 한 번도 참석하지 않고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것이 평일과 다름없었다. 세조가 사저로 물러나 자성왕비와 함께 서로 대했고, 울다가 비통함이 지나 기운이 없어지자 약을 먹고 해결까지 했다. 세조 가로되, “대행의 은덕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내 마음을 다해주길 바랄 뿐이야. 대행이 천성적으로 착하고 효도하며 사람들에 대해 신의가 두터워 가볍게 절물을 하지 않았다. 세종 상사 때 졸곡 후에 내가 본래 일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반드시 집에 있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여 항상 와서 시종할 것을 명하였고, 또 나에게 정대하고 충성하며 지식이 남들보다 다르다고 하여 늘 함께 일을 논하였다. 일찍이 진법을 만들었지만 말하기를 이정·제갈량인은 어찌 수양보다 좋을까 생각했다. 또 일찍이 내궁에서 찬양한 것을 수양은 비상한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대저 형제간에 우애하는 마음이 천성에서 나왔으니 우리 형제가 이로써 감격하여 울기를 끝없이 하였다.했다. 대행왕이 병이 위독해지자 좌우로 말하기를 수양을 만나고 싶다.그러나 좌우에서 그릇의 숙의라고 알아듣고 끝내 부르지 않았는데 대개 뒷일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 승계범 – 약간 개연성은 인정됩니다. 그래서 문종이 죽는 입장에서 만약 내가 문종의 입장이었다면 종국이는 분주할 것이고, 내 동생들은 이미 야심찬 사람들이 있어서 수양대군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 것이고, 내 아이도 강단 있는 아이가 아니라 12살인가 13살인가 즉위했습니다. 그때는 아직 어린 나이여서 불안해요. 그러면 오히려 제가 죽을 처지에 놓이게 되면 그동안 제가 견제하던 사람에게 부탁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어린아이가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를 텐데 누구에게 그 안위를 부탁하겠는가. 결국 같은 왕실의 잠재적인 적이었을 수도 있는 수양대군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불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 그러나 이 말이 수양의 입에서 나온 말이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한 말을 보면 의심할 만한 이야기이며, 만약 수양대군을 불렀다 하더라도 문종이 수양대군에게 세자는 너무 어리니 네가 보위를 이어받아 국사를 책임지라고 부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 또한 문종실록은 단종 2년인 1454년 편찬을 시작하여 세조 1년인 1455년 7월에 완성된 책이어서 문종실록, 단종실록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한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 서기 1452년 5월 14일에 해당하는 조선왕조실록의 문종 사망 기사, 즉 졸기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 이때 의정부 대신들은 왕의 병환이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었음에도 다만
역사를 찾고< 제520편>”로산 군 일기” 어떻게 읽은 거 방송:2014년 10월 12일(일)00:05~01:00(한민족 방송 제1라디오)각본-나·상락 연출-김·대성 글 순 1부:세자의 결혼식을 치르지 못하고 깊은 병중에 빠진 2부:문정의 죽음이 던져역사적 의미 3부:과연 문정은 독살되었는가?제4부:”로산 군 일기” 어떻게 읽거나 제3부:과연 문종은 독살된 것일까? ▷ 조선 왕조 실록이 기록만으로 보면, 문종은 아무 유언도 남기지 않고 눈을 내리자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련려실 기술”에는 문종이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성삼 문 등에 어린 세자의 안위를 부탁했다는 내용의 기록이 나오고 있다. 문종은 병에 시달리는 와중에 집현전 여러 신하들을 부르고 촛불을 켜고 이야기를 나누고 한밤중이 되면 무릎 아래에 어린 단종을 앉히고 손으로 등을 쓰다듬으며 어린 단종의 후일을 부탁한다. -송·삼문, 박·펭뇨은, 신·스쿠 성주 등은 주로 건물 밑의 충실한 신하로서 멋지고 후일 보위를 이어받은 세자 전하께서 훌륭한 군주가 되도록 정성껏 모시겠다고 다짐했다. -문정이 술잔을 들고 권하자 송·삼문, 박·펭뇨은, 신·스쿠 성주 등이 모두 취하도록 마셨다. 이윽고 신하들이 모두 왕 앞에 쓰러지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입직청에 나란히 뉘어 놓았다. 그 밤에 폭설이 내렸지만 다음날 아침 신하들이 술을 깨고 보면 이상한 향기가 방 안에 가득하면서 전신에는 모피의 가죽옷으로 뒤덮였다. 왕이 직접 덮어 준 것이다. 신하들은 감격하고 눈물을 흘리며 왕의 특별한 은혜에 보답을 다짐했다. -문종이 병이 있었지만 아직 기력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집현전 학자들에게 어린 세자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다면 자신의 병세가 이미 가망이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런데 용료실 기술의 이 기사의 마지막에는 이런 말이 부과되어 있다. “그러나 훗날 숙주의 거취는 그 형태가 되어 버렸다.”훗날 성삼 문 박·펭뇨은 등이 단종 복위 운동을 하고 처형된 것과 달리 같은 집현전 학사 출신이면서도 신·스쿠 주는 단종을 죽인 세조에 협조했기 때문에 그런 구절을 덧붙였다. 물론 이 내용은 조선 왕조 실록에는 없는 내용이다. ▷ 문종은 오래 며칠 동안 병으로 숨졌지만 그의 치밀한 성격상 12세의 어린 세자를 남기고 무슨 유언도 없이 눈을 내렸다는 점이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조선 국왕 이야기”에서 저자의 임·용항은 이런 의문을 제기하다. “문종은 병상에 누워서 10여일 지난 5월 14일 유시에 강녕 송정에서 사망했다. 실록에서는 전날까지 중태가 아니라 호전했지만 이 날 갑자기 사망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언도 없었다. 또한 의정부의 관리들은 국왕이 위독한데도 하급 관리들만 하며 안부를 물을 뿐 누구도 왕을 면치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도 조작의 냄새가 난다. 유언이 없다는 것은 국왕의 유훈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면서 후계자로서 단종의 권한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이다”-무슨 뜻이냐고 하면 만약 문종이 병 자리에서 대신과 수양 대군을 비롯한 왕자들을 부르며 어린 세자가 보위를 이어 국정을 찾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과인한 것과 다름 없는 충성심에서 새로운 왕을 보좌해야 한다는 유언을 하고도 어린 단종을 왕위에서 몰아낸다면 그것은 명백한 반역 행위이다. 그래서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수양 대군이 역적이 되기 때문에 일부러 문종이 아무 유언도 안 남긴 것으로 처리한 것 이런 분석이다. ▷ 단종 즉위 해 5월 18일의 기록을 보면, 문종의 유언과 관련해서 조금 이상한 기록이 보인다. -문종이 돌아가시기 전에 동생인 수양 대군에 만나겠다고 말했지만 주변 사람들이 “수양”라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후궁인 “숙의 등”에 만나고 싶다고 이해하고 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 다음의 한절에서는 문종이 수양을 부른다고 한 것은 “후사를 부탁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와 문종의 속내까지 짐작하고 썼다. 실제로 문종은 숨을 거두기 전 동생의 수양 대군을 불렀을 가능성이 있을까? 단종 실록 1권, 단종 즉위 해 5월 18일 경술 4번째 기사 1452년 경태 3년 근정문에서 즉위하는 교서를 반포하다 노야 마 군이 근정문에서 즉위, 반 교회할 것을 “정중하게 생각하면 태조가 하늘의 밝은 명령을 받고 대동을 웅거하고 차지하는, 태종·세종이 선업을 빛내고 보급하고 문치에 태평 성대로 이르는, 생략 당초에 제사를 지네는 조목을 논의할 때 겸판 이조 다음과 같이 공사는 조공이다. 이날 에이지와 백 관들은 모두 소리 없이 울고, 세조가 가장 비통하게 생각했다. 이·용은 승하한 뒤 우메요 오 궁전의 뜰에 들어간다며 좋아하실 것이 얼굴에 나타났다. 상제에 곡식 임 할 때 세조가 아이 아픔이 지성에서 나오기 때문에, 조신들로 바라보는 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지만 이·영만은 한번도 참여하지 않고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것이 평일과 다름없었다. 세조가 사저로 물러서고 자 성왕 왕세자비와 함께 서로 접하고 울고 비통함이 지나고 기운이 없어지고 약을 마시고 해결까지 했다. 세조 왈,”대행의 은덕을 무슨 수로 다 할 수 있겠는가. 내 마음을 다하고 바랄 뿐이다. 대행이 본래 선하고 효자로 사람들에 대한 신의가 두텁고 가볍게 절물을 하지 않았다. 세종의 상사 때 졸곡 후에 제가 본래 일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꼭 집에 있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항상 오고 시종하는 것을 명했고 나 사다 크기로 충성하는 지식이 남들보다 다르다고 해서 항상 함께 일을 논했다. 과거진 법을 만들었지만 말에는 “이정·제갈량 료토는 왜 수양보다 좋을까”라고 생각했다. 또 과거 신궁에서 칭찬한 것을 “수양은 비상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대저 형제 간에 우애하는 마음이 천성에서 나온 것으로 우리 형제가 이에 감격하고 우는 것을 끝없이했다.” 했다. 대행 왕이 병이 위독에 되면 좌우로 말을 『 수양을 만나고 싶다.”그러나 좌우에서 그릇의 숙의 등과 듣고 드디어 부르지 않았지만 대개 뒷일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 계승범-조금 개연성은 인정됩니다. 그래서 문종이 죽는 입장에서 만약 내가 문종의 입장이었다면 죠은국는 급히고 동생들은 이미 야심적인 사람이 있어서 수양 대군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있고 자신의 아이도 강단 있는 아이는 아니라 12세나 13세가 즉위했습니다. 그때는 아직 어린 나이여서 불안합니다. 그럼 오히려 내가 죽는 입장에 놓이면 그 동안 자신이 견제했던 사람에게 부탁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어린 아이가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를 것인데 누구에게 그 안위를 부탁할까. 결국 같은 왕실의 잠재적 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수양 대군에게 부탁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불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 하지만 이 말이 수양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자신에게 유리하게 말한 것을 보려고 의심 말이고 만약 수양 대군을 불렀다고 해도 문종이 수양 대군에,”세자는 어려서 너가 보위를 이어받아 국사를 책임 지는 “로 지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문종 실록은 단종 2년 1454년에 편찬을 시작하고 세조 1년 1455년 7월에 완성된 책이어서 문종 실록 단종 실록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 서기 1452년 5월 14일인 조선 왕조 실록의 문종 사망 기사, 즉 졸기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이 때 의정부의 대신들은 왕의 병이 위급한 상황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